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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길은 '명당'… 사람 냄새를 찾아가 볼 것

렌즈 35㎜·셔터스피드 1/160 sec·조리개 f/5.6·감도 ISO 400

 

담벼락 앞에 빨래집게를 엮어 왕관처럼 머리에 쓴 남자 아이가 서 있다.

 수줍게 해죽 웃는 입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운 표정이다.

 어떤 장난꾸러기들은 당시 유행하던 코미디 프로그램 '쓰리랑 부부' 흉내를 내듯

다 같이 눈썹에 새까만 검정 테이프를 일자로 붙이고 좁은 길에 우르르 모였다.

 녀석들이 끌어안은 강아지 눈썹에도 검정 테이프가 일자로 붙어 있다.

사진가 고(故) 김기찬(1938~2005)은 살아생전 30여년에 걸쳐 우리나라 골목 안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가 찍은 사진을 보다 보면 설명하기 어려운 그리움이 '울컥' 목까지 올라온다.

골목 풍경은 곧 내가 자라온 시대의 풍경이기도 하다. 사실 골목처럼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장소도 없다.

또 골목처럼 사진적으로 완벽한 구도를 갖춘 공간도 찾기 쉽지 않다. 이래저래 골목은

사진 찍는 사람이라면 놓쳐서는 안 될 또 하나의 '명당'이다.

좁고 구불구불한 길. 사실 이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그림이 된다.

사진의 구도는 본디 열린 넓은 공간보단 닫힌 좁은 공간에서 완성되니 말이다.

골목엔 그러나 길만 있는 게 아니다. 골목엔 사람이 있다. 그 골목에 들어선 집.

그 집에 사는 사람들. 그들이 얽히고설켜 이야깃거리를 만든다. 사람 냄새를 풍긴다.

골목은 그래서 언제나 무궁무진한 사진 거리를 제공한다.

강아지를 쫓아다니는 아이. 빨래를 탁탁 터는 여자. 내다 버리려고 쌓아둔 고물 가구와 책 등등….

난 그래서 무작정 사진을 찍고 싶을 땐 대개 가까운 골목길을 헤매는 것부터 택한다.

언젠가 서울 종로 피맛골 골목에서 찍은 이 냉장고 사진도 그렇게 얻었다.

피맛골이 사라지기 직전, 이미 가게들은 하나 둘 문을 닫았다.

골목은 이미 절반쯤 허물어져 한창 공사 중이었다. 공사 가림막 아래 누군가가

내다 버린 고물 냉장고. 멀리 보이는 빌딩. 냉장고와 빌딩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서 있지만,

두 피사체의 운명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골목을 뒤지다 보면 때때로 이렇게 뜻밖의 풍경과 마주한다.

시간을 조금 허비해도 아까워하지 않을 마음의 여유만 넉넉히 챙긴다면

누구나 좋은 사진을 한 장쯤 건질 수 있다. 한 가지 더. 사진에 좀 더 욕심을 내는 사람이라면,

같은 골목이라도 여러 번 가볼 것을 권한다. 골목 사람들과 얼굴을 미리 익힐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들의 모습을 찍을 때 갑자기 낯선 사람처럼 나타나 '펑' 하고 찍는 것보단,

이미 안면을 튼 또 하나의 이웃으로 다가가 사진을 찍는 게 더 자연스러울 테니 말이다.

예전엔 골목이 무척 흔했지만, 이젠 하나 둘 사라져 점점 주변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다.

 더 사라지기 전에 한 장이라도 더 찍어서 남겨두면 어떨까. 시간이 흘러도, 기록은 남는다.

우리가 떠나가도, 우리가 살았던 흔적은 그렇게 사각 프레임에 아련하게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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