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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약력

 1971년 서울 출생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사진 디자인전공

작가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blueart11

 

'김영경' 사진가의 Works : 네이버 블로그

김영경 사진가의 공식블로그입니다.

blog.naver.com

김영경展 2009_0313 ▶ 2009_0328

 김영경_blend-polis#05_pigment print_80X172cm_2007

 

blend_polis

김영경 / KIMYEONGKYEONG / 金暎卿 / Photography2009_0313 2009_0328

초대일시 2009_0313 금요일 오후6시. 관람시간 11:00am ~ 7:00pm / 월요일 휴관

 

가회동60 스페이스향리 GAHOEDONG60 SPACE HYANGLI 서울 종로구 가회동 60번지

Tel. +82.2.3673.0585

www.hyangli.com

 

blend_polis: 판타지와 폐허가 뒤섞인 도시 / 장다은 (미술 비평)

오늘날 건축은 자본주의를 유지 및 촉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건설되거나 파괴되는 순환반복의 구조 속에 편입되어 있다.

이 구조 안에서는 모든 건축 공사가 2가지 범주로만 귀속된다. 도시 기획에 맞춰 새로이 지어져 판타지적 꿈을 확장시키느냐,

아니면 잊어버려야 할 과거로 철거되고 마느냐. 김영경의 사진에서는 이 두 가지가 혼재한다.

 

* 기록과 비판으로서의 건축 사진: 김영경 2003년부터 제작한 <blend_polis>연작은 줄곧 서울의 도시 풍경, 특히 곧 철거될()

근대 건축물에 관심을 쏟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게 될 주 대상은 동대문 운동장과 서울시청사이다. 특히 동대문 운동장 작업은

최근 철거되기까지 몇 년간 수차례의 용도변경이 있었는데 김영경은 몇 년에 걸쳐 그 내용을 작업 과정에 담고 있다.

동대문 사진 연작에서 눈여겨 볼 점은  일제 때 지어진 이 건물의 낡은 표면이 그 뒤에 솟아오른 화려하게 빛나는 밀리오레라는

현대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상업건물과 사선으로 대비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선대비는 오래전부터 김영경이 지속해온  조형적 장치이다.

그러나 초창기 사진이 교외에 버려진 건축 자재나 폐허의 풍경을 근경에 두고, 그 너머 아스라한 불빛과 대조시키면서 어딘지를 알 수 없는

추상적 공간을 표현했다면<blend_polis>시리즈에서는 서울의 구체적인 랜드 마크를 주요 소재로 삼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작업이 이전보다 현시대의 사회 문화적인 맥락에 좀 더 밀접히 다가섬을 암시한다. 자본주의 논리에 따른 건축물의

철거와 신축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이전의 작가들에게서 그 계보를  찾아볼 수 있다. 현대 미술에서 보자면, 우선 1950년대 유럽의 상황주의자들은 

르 꼬르뷔제(Le Corbusier)의 기계미학을 도시의 환등상(Phantasmagoria)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그 이론적 정초를 다진 바 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970년대 미국에서는  고든 마타-클락(Gordon Matta-Clark)을 선두로 한  ‘아나키텍쳐(Anarchitecture)’그룹이

폐허로 철거되는 건축물과 화려한 신축 건물-특히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주목-을 대비한 다양한 흑백 사진을 제작수집하였다.

좀 더 사진사의 맥락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하자면, 1960-70년대  베허 부부(Bernd and Hilla Becher)유형학적 건축 사진은 비록

형식주의 미학이 강조되어 있긴 하나후기 산업시대에 폐기된 건물을 찍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에 대한 사회 정치적 맥락을 제고한 점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1970년대 로버트 아담스(Robert Adams)나 루이스 발츠(Lewis Baltz)등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뉴 토포그래픽스(New Topographics)’에서는 그 비판성이 훨씬 구체적이고, 증폭된다. 하지만 인간에 의해 건설된 구조물과

자연 풍경을 대비한 후자의 사진은 얼마간의 주관성과 미적 실험이 있다고는 하나, 기존 다큐멘터리 사진의 형식적 계보에

충실한 듯 8x10사이즈의 흑백 형식은 지나치게 엄숙한 측면이 있다.

 

 

* 서정적 밤풍경과 낯설게 하기: 김영경의 말대로 비판을 위해 꼭 스트레이트 포토나 딱딱한 흑백의 다큐사진을 고집해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의 사진은 도시 건축에 대해 비판적 논지를 견지하면서도 초창기 작업부터 지속해왔던 서정성을 잃지 않고 있다.

특히 커다란 화면을 장식하는 화려한 색채로 두드러지는 그 서정성은 밤풍경을 촬영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그는 한낮의 햇볕을 이용하거나 있는 그대로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도시의 기억과 호흡을 켜켜이 간직한 콘크리트 벽과 철 구조물을

아스라한 인공조명 아래 숨기듯 드러낸다. 그러한 어스름한 빛 속에서 건물의 전면이 드러나지 않은 채, 심플한 기하학적 구도 속에

편입된 동대문 운동장은 그런데 왠지 낯설다.

 

친숙해야 할 우리 주변의 풍경이 낯설게 다가오는 그러한 언캐니(uncanny)함은 그의 다른 작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텅 빈 공터 너머로 교회의 십자가와 함께 반짝이는 로봇처럼 서 있는 건물 사진, <blend_polis#02>(2003)는 우리가 마치 외계

세계에 온 것 같은 섬뜩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원래 이렇게 낯설게 하기는 그동안 많은 예술가들이 대상에 비판적 거리를 두도록 하기 위한

전략으로 자주 이용해왔다. 일례로,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ndreas Gursky)의 쨍하게 깨질듯, 눈부신 조명으로 가득 찬 인적 없는

건물 사진은 매우 낯설게 다가온다. 화려한 빛은 너무도 유혹적이지만, 어딘가 비현실적인 기묘한 낯설음 때문에 우리는 그 공간에 무한정

빠져들 수만은 없게 된다. 이로써 자본주의의 화려한 스펙터클을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게끔 하려한 그의 의도는 성공하는 셈이다.

 

영경의 서울시청사를 담은 <blend_polis#05>(2007) 역시 기묘한 낯섦을 불러일으킨다.특히 이 사진은 한국의 근대를

그대로 간직한 건물이라는 역사적 서사를 기반에 두고, 도시의 역사적 기억과 자본주의의 판타지적 욕망이 혼재하고 있는 양상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새로운 도시 개발을 위해 이제 곧 일부 철거와 리모델링을 앞둔 이 건물은 주변의 현대 건축에

뒤지지 않으려는 듯도시 미관이라는 미명하에 화려한 조명으로 오래된 몸을 감추고 있는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 도시를 배회하기: <blend_polis> 연작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복잡한 성격만큼이나 그 표현이 내밀하게 혼재되어 있다.

기록과 비판, 서정적 감수성과 동경이 은밀히 섞여 있는 것이다. 정부의 수주를 받고 도시 재개발로 철거될 건물을 기록하기 위해

집체만한 카메라를 마차에 싣고 다니던 19세기 파리 사진사처럼, 자본주의 논리로 치장된 화려한 도시 스펙터클에 균열을 가하기 위해

며칠 밤을 표류하던 상황주의자들처럼, 그리고 뉴욕의 서정적 밤풍경을 찾아 헤맨 현대 사진가 잰 스텔러(Jan Staller)처럼,

김영경은 요즘도 늦은 밤 서울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건물들을 찍는다. 그것이 기록을 위한 것이든 비판의 날을 

세우기 위한 것이든 혹은 은연히 드러나는 개인의 서정적 향수를 충족하려는 것이든, 결국 김영경의 사진은 blend_polis로써의 서울,

그 자체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김영경_blend-polis#03_pigment print_80X172cm_2007

 

김영경_blend-polis#04_pigment print_80X172cm_2007

김영경_blend-polis#02_pigment print_80X172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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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진의 거장 로베르 두아노(Robert Doisneau, 1912-1994)

 

프랑스의 사진작가.  처음에 인쇄공으로, 공업사진을 촬영했으며, 1938년 사진가로 독립.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리 시민들의 생활상을

담은 예술사진들을 발표했으며, 1950년에 나온 《시청 앞에서의 키스》는 걸작으로 꼽힌다. 파리 시민의 삶을 사실적이고

낭만적인 흑백사진에 담았다. 프랑스 신문과 미국의 라이프 지 등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했다.

 

 "나는 삶 그 자체를 찍기보다,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을 찍는다"라고 했던 로베르 두아노(Robert Doisneau, 1912~1994년).

그는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 윌리 로니스(Willy Ronis)와 함께  3대 휴머니즘 사진가로 불린다.

광고, 산업사진가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그가 전 세계인들에게 널리 사랑 받았던 것에는 바로 파리 거리의 사진들이 있었다.

어두운 시대 상황 속에도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은 인물 사진들은 유머가 넘치며 따스하다. 프랑스 외곽 지역인 장티이(Gentilly)에서 태어난

로베르 두아노는 한 평생을 교외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은  소박한 일상의 풍경을 향했으며, 파리와 같은 도시로 작업 영역을

넓혀 가면서 도시 생활의 풍경을 포착하기도 했다. 두아노의 개인사를 보자면, 그는 불운한 삶이었다. 1차 세계대전으로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당시 유럽의 상황은 전쟁으로 인한 고아들과 피난민들이 거리에 넘쳤다. 산업혁명과 경제공황이 이어졌던 격변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아노는

사진 작업을 통해 삶의 의지를 잃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촬영병이었던 그는 1931년 앙드레 비뇨(Andre Vigneau)의 어시스턴트로

일하면서 사진가로 인정받게 된다. 이후 렉셀시오(L’Excelsior)지의 광고 사진을, 르노 자동차 회사에 취직해 산업사진을 찍고,

1949년부터 1951년까지 프랑스 보그지의 패션 사진가로도 활동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 그룹 피프틴(Group 15)의 일원으로 지내면서,

당시 유명한 사진가, 예술가들과 친분을 맺어갔다. 그때 피카소, 자코메티 등의 인물사진을 찍었다.

   
로베르 두아노(Robert Doisneau)의 사진들 

'파리 시청 앞 광장에서의 키스'(1950)

파리 시청 앞 광장을 걷던 젊은 남녀가 뜨겁게 키스를 나눈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알리는 방송이 나온 후였다. 이들은 기쁨에 찬 나머지 주변의 행인들은

아랑곳 하지 않는 모습이다. 사실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이 흑백사진은 포스터와 엽서, 티셔츠에 인쇄되는 등 전 세계적으로 '젊은 사랑'의 상징으로

사랑받아오다 세간의 논란거리가 되기도 한다. 사진이 세상에 나온 지 55년 후, 연출된 사진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런 논란에도 이 작품은 당대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사랑하는 사진으로 남아 있다.

Musician in the Rain

프랑스의 국민 시인인 자크 프레베르 - 파리에서 출생했으며 초현실주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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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의 사진은 일시 정지된 화면처럼 과거와 미래를 잇고 있다 - 배우 박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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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담다, 가족을 말하다… ‘전몽각 그리고 윤미네 집

 2012. 01.21 글에서 옮겨오다

 

 가족사진을 잘 찍고 싶은가. 그렇다면 ‘윤미네 집’을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성균관대 부총장을 역임한 고 전몽각 선생이 딸 윤미 씨가

태어나서부터 결혼할 때까지 찍은 가족사진을 담은 책 ‘윤미네집’은 1990년 처음 출간할 때 화제를 모은데 이어 올해 복간돼서

또 화제를 모으고 있다. 수십 년 전 사진들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엄마의 젖을 움켜쥐고 힘차게 빠는

아가의 행복한 표정, 냄비에 든 마지막 국물까지 비우는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에 가득한 미소, 화장을 하다가 거울을 바라보는

딸의 환한 얼굴, 숙녀가 된 딸의 옷매무세를 잡아주는 엄마의 진지함과 새 옷을 걸친 딸의 약간은 겸연쩍은 듯한 표정….

거기에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정(父情) 만큼은 화면 가득이 차고도 넘쳤다. 그러다가 몇몇 사진에서 아빠는 딸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거울 안에서 환하게 웃는 딸의 모습을 찍으면서 아빠는 거울 속으로 따라 들어간다. 아니 거울이 아니라 딸의 웃음 속으로 빠져든 것 같다.
이런 사진을 찍은 전몽각(1931-2006) 선생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 중책을 맡았던 토목공학자로 나중에 성대 교수를 거쳐 부총장까지

지냈다. 그러나 사진에서 드러났듯이 지금은 그의 이름 석 자보다는 ‘윤미네 집’의 윤미아빠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예술이 그만큼 길어서일까.  여기엔 사연이 있다.

한국 사진의 조형주의를 열다

가족애를 잘 표현한 ‘윤미네집’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한국 사진의 초창기를 개척한 인물이기도 하다. 초기 사진가들의 동호회와 같던 ‘싸롱 아루스’ 산하로

현대사진연구회를 창립한 그는 조형주의 사진을 추구해 한국 현대사진이 다양한 시각과 경향을 갖고 발전할 수 있는 근간을 만들었다.
대상의 디테일과 사실성을 생략하고 화면 구성과 조형성을 강조한 사진을 추구한 것이다. 권명광 전 홍대 총장이나 조순형 의원, 사진가 박영숙·황규태 씨 등이 그 때 멤버였다.
사진가 주명덕은 “그 당시는 모두가 아마추어였다. 내가 (현대사진연구회에) 들어갔을 때 전몽각 선생은 현인 같은 선배였다”고 회상했다.
그렇지만 원래 그의 직업은 토목공학자였다. 서울대 토목공학과를 나온 그는 국립건설연구소에 들어가면서 고속도로와 인연을 맺었고

나중에 토목학회에 큰 족적을 남기고 했다.이번 전시회엔 이런 다양한 길을 걸었던 그의 자취를 담은 사진이 모두 나온다.

‘전몽각 그리고 윤미네 집’이란 제목으로 열리는 전시회는 크게 3부로 구성된다.

1부는 가족의 풍경 ‘윤미네 집’, 2부는 현대화의 풍경 ‘경부고속도로’, 3부는 한국사진의 풍경 ‘현대사진연구회’ 등으로 나뉜다.

전체 150여점의 사진 가운데 70점 정도를 차지하는 ‘윤미네 집’은 전몽각 선생 가족의 사진이지만60년대부터 80년대 말까지의

보편적 가족사의 미시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당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은 집에서 살았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온 가족이 한 방에서 지냈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녔어도 낙이 있었다.

 

전 선생의 부인 이문강 여사는 “10평짜리 마포 아파트에 살 때 32공탄을 땠다. 꽤 무거웠을 뿐 아니라 불이 붙은 것이라 옮기는 게

쉽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많이 도와줬다”고 회상했다. 그는 또 “지금 보아도 부끄러워 내놓기가 싫은 사진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만큼 소박하면서도 진실한 사진이기에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진은 제목만 봐서는

다소 딱딱할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찾아보기조차  힘든 시골 모습을 보여줘 귀할 뿐 아니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사진이기도 하다.

시골집 바로 앞에서 고속도로 건설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한 아낙은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빨래를 널고 집안일을 하고 있다.

갓 쓴 노인들이 흙을 밀어대는 불도저를 구경하거나 마을 아낙들이 공사장 가운데를 건너가는 장면도 보인다.

돌담 밖에 흙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불도저를 화난 듯 바라보는 사내의 사진도 있다.

지금은 사진에서만 겨우 볼 수 있는 장면들이다.

 

이문강 여사는 “애들에겐 자상한 아빠였지만 고속도로 건설 때는 까다롭기로 소문이 나 건설사들이 흠을 잡으려고 할 정도였다”고 고인을 소개했다.
‘싸롱 아루스·현대사진연구회’ 편에선 한국 사진사에 남을 만한 초기 조형주의 사진들을 만나볼 수 있다.  묘하게도 최근 네티즌들이 자주

올리는 사진들이 이들 사진을 많이 닮은 것 같다. 전몽각 선생이 얼마나 앞서 갔는지를 새삼 생각게 된다.

 

전시를 기획한 주명덕 사진가는  “‘윤미네 집’에 나온 사진들은 작품 이전에 우리 삶의 보편적 이야기다”면서

“전시장엔 경부고속도로 사진을 더 크게 걸었는데 사람들이 보고 배우라고 그렇게 했다”고 설명했다.

 

사랑을 담다, 가족을 말하다… ‘전몽각 그리고 윤미네 집’ 展 사진 주인공 전윤미씨

 

 

옷을 곱게 차려 입은 한 중년 관객이 지난 23일 흑백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갓난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젖을 빨고 있는 사진이었다.

회상에 잠긴 듯했다. 그러곤 이내 눈물을 흘렸다. “고생하셨던 부모님, 제 어린 시절, 또 지금 자라나는 제 딸이 동시에 생각 나

눈물을 참을 수 없네요.”  ‘전몽각 그리고 윤미네 집’ 사진전. 1971년 첫 번째, 78년 두 번째 사진전 이후 32년 만에 다시 열렸다.

아마추어 사진작가 전몽각(1931∼2006·전 성균관대 토목공학과 교수)의 사진에 담긴 따뜻한 숨결은 변치 않고 남아 있다.

그는 큰딸 윤미씨의 출생(1964년)부터 결혼(1989년)까지를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27일 사진 속 주인공 윤미씨와 어렵게 전화로 연결됐다. 윤미씨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얼바인에서
1남 1녀의 어머니로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아버지의 가족 사랑을 전했다.

새 생명의 탄생, 사진의 시작
초보 아빠 전몽각. 카메라를 든 채 태어난 지 3일 된 윤미가 집에 오기만을 기다렸다.
서울 마포 임대아파트 조그만 문 사이로

이불에 싸인 아기가 들어오자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윤미의 첫 사진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였어요. 내의만 입고 있는 모습을 찍으려 하시더라고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도망을 쳤죠.

하지만 아빠는 끝까지 쫓아오셔서 저를 잡고 사진을 찍으셨어요.” 오랜만에 옛 생각에 빠져든 것 같았다. 친구와 싸우고 돌아와 울었을 때

달래주기는커녕 그 모습까지 카메라에 담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 윤미씨는 크게 웃었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저도 사진 찍는 걸 참 좋아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때 사진을 보면
‘어쩜 꼬마가 저렇게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사진을 찍을까’하고 스스로 놀라요.” 아껴둔 말이 많은 듯 이야기보따리를 꺼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어요. 가족 모두 북한산에 올랐죠. 산 정상에 바위가 있었는데
아빠가 굳이 오르자고 하시지 않겠어요.

저희 3남매의 표정이 어땠겠어요. 순식간에 사색이 됐죠. 그런데 아빠는 무서워하는 저희 표정이 재밌다며 오히려

바위 반대쪽으로 가셔서 저희를 찍으셨어요.” 바위 반대쪽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안 건 뒤늦게였다.
“실족사고가 빈번히 일어났던 곳이었음에도 아빤 두렵지도 않으셨나 봐요.
저희 모습을 담는 게 최우선이셨던 거죠.”
사춘기가 되자 카메라 앞에 서는 걸 꺼리게 됐다.
“아빠 역시 ‘우리 윤미 중학생 된 뒤부터는 사진 수가 줄었어’라고 장난스럽게

볼멘소리를 하시기도 했죠.”

고집불통 우리 아빠
전몽각은 71년 서울 신세계백화점에서 사진전을 열었다. 첫 사진전에 얽힌 일화도 웃음을 자아냈다.

“처음 아빠가 제 사진을 찍을 때 엄마는 ‘그냥 찍나보다’ 하셨대요. 갑자기 사진전을 연다고 하셨다는군요. 엄마가 ‘사진전 거리나 되겠어요’라고

묻자 당연히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대요.” 못 나온 사진, 창피한 모습이 드러난 사진은 제발 빼달라는 가족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막내 동생이 자장면을 먹다 자장을 입에 잔뜩 묻힌 적이 있어요. 아빠는 카메라를 들이대셨죠.

너무 재밌다며 천진난만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선해요. 그런데 그 사진을 전시하신 거예요. 동생 친구들이 전시회에 와서 사진을 보고

무척이나 놀렸답니다. 얼마나 창피해하던지요.” 윤미씨가 결혼식을 올린 날, 전몽각은 딸 사진을 그만 찍기로 결심했다.

수없이 셔터를 눌러온 그의 손가락도 그제야 조금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또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90년에 발간된 ‘윤미네 집’이라는 제목의 사진집이었다.

“결혼 두 달 만에 미국에 왔어요. 적응하는 데 꽤 애를 먹었어요.
1년이 지나 한참 가족 생각이 날 무렵에 사진집을 받았어요.

아빠의 오랜 꿈인 건 알았지만 사진집으로 만들어 내실 줄 몰랐거든요. 감격에 참 많이 울었어요.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그는 풍족하지는 않아도 가족끼리 아끼고 사랑하고 함께 웃을 수 있어 행복했다고 했다

.“당시 아빠랑 잠옷차림으로 거울 앞에서 찍은 사진이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아요.엄마랑 3남매 사진은 많은데 아빠가 나온 사진은

드물거든요. 그 사진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져요.”

 

남편의 마지막 선물
이날 미술관에서 만난 윤미씨 모친 이문강(70)씨도 남편의 가족 사랑을 회상했다.
“결혼 후 경제적으로 힘든 나날이 이어졌죠. 국립건설연구소에 다니던 남편 월급으로는
생활비가 모자랐어요.

저도 그때 철없이 직장을 관두었고요. 살아갈 수록 남편이 찍어 놓은 사진들 하나하나가 큰 힘이 되더군요.”

남편은 항상 자신을 예쁘고, 착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대했다고 기억했다.
“2002년 7월말이었어요. 하루는 남편이 한강둔치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컨디션이
영 안 좋아 보였어요.

서울대병원에 가 초음파 검사를 해보니 췌장암 진단이 나왔습니다. 길어야 6개월이라는 의사의 말, 청천벽력과 같았죠.”
그런 말을 듣고도 전몽각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이씨는 의아했다.
얼마 살지 못한다는 소식을 접한 뒤부터 오히려

더 바쁘게 지내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아서였을까요. 몸도 안 좋으신 분이 급하게 뭘 만든다고 하더군요.

그게 초판 ‘윤미네 집’ 사진에 제 사진을 추가해 만든 증보판 ‘마이 와이프’였어요.”
‘마이 와이프’를 만드는 동안 전몽각은 어느 때보다 건강하게 작업을 해 나갔다.
3개월, 6개월, 1년이 지나도 건강은 악화되지 않았다.
“가족의 기도가 간절했고 치료도 잘 받으셨어요. 사진에 대한 열정 역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겠죠. 주치의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죠.”
아버지의 쾌유를 위해 윤미씨도 멀리서 기도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한인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그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진을

좀 더 찍을 수 있게 해달라고 마음을 다해 기도했다. 기도가 통해서였을까. 6개월밖에 못 산다던 전몽각은 4년이나 사진을

더 찍은 뒤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가족의 소중함, 공유했으면
모녀는 남편과 아버지를 ‘참 자상하셨던 분’으로 기억했다.
 남편의 기억을 더듬던 아내의 눈이 촉촉해졌다.
“결혼기념일이나 제 생일은 한번도 챙기지 않으시던 분이 돌아가시기 전 ‘마이 와이프’를
마지막 선물로 주시더군요.

사진과 글에서 남편의 사랑이 느껴져 눈물이 멈추질 않았어요.” 윤미씨 역시 아버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저희 가족은 특별하고도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어요. 아버지께 항상 감사하죠.
그런데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보니 엄마가 없었으면

아빠가 사진작가를 하시기 어려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먹고 살기도 빠듯했던 60∼70년대, 아버지의 취미 활동을 내조한

어머니 역시 존경스럽다고 했다.이씨는 남편의 사진이 지금 세대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걸 감사히 여겼다.
통화 막바지, 윤미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아버지, 하늘나라에서 지금도 원하는 사진 마음껏 찍고 계시죠?

우리 다시 만나면 또 찍어 주셔야 해요.”


■ 전몽각은 1972년부터 96년까지 성균관대 토목공학과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큰딸 윤미씨가 성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한 아마추어 사진작가이기도 했다. 71년 사진전을 통해 처음 사진을 공개했다. 90년에는 사진집 ‘윤미네 집’을 출간했다.

생활사진작가라는 사진사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 사진계의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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