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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 온정리에 있는 신라시대의 사찰 -  신계사(神溪寺)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외금강 온정리에서 옥류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로, 신라의 보운()이

 519년(법흥왕 6)에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확실하진 않다.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597년에

다시 세웠으나 1951년 6.28 전란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3층석탑 1기와 부도 만이 남아있다.

유점사·장안사·표훈사와 함께 금강산의 4대 사찰로 꼽힌다. 신라시대에 김유신, 고려시대 묘청 등이

신계사를 크게 만드는 데 참여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 사명대사, 처영대사가 승군을

조직한 곳이기도 하다. 원래 이름은 신라의 신() 자를 따서  신계사()라 하였으나,

뒤에 귀신 신() 자의 신계사로 바뀌었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전해지는데,

신계사의 절터 계곡인 신계천에는 해마다 많은 연어가 올라와 사람들이 이 연어를 잡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를 본 보운이 살생을 금하는 불교 교리에 따라 신통력을 발휘해 연어떼가 계곡으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신계사의 신() 자가 신()으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 2007년10월에 찾은 신계사는 남북 합작으로  복원 공사가 한창이었다.

▼ 절 뒤로 보이는 문필봉

 

산봉우리가 붓모양처럼 생겼다고 하여 문필봉이라 불리우며, 옛 선조들이 과거시험 보러갈 때

금강산 문필봉에 꼭 들러 기도를 올린후 과거시험에 응시하러 갔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이율곡선생께서도 과거시험 보기전 들렀 곳이라 더욱 유명하다.

 

 

 

 

 

 

 

▼신계사 3층 석탑은 이 사찰을 창건할 때 세운 1,400여년이나 되는 오랜 유물로써 정양사 3층 석탑,

장안사 3층 석탑과 함께 <금강산 3대 석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탑은 대웅전터 앞에 있으며,

대웅전과 만세루를 통하던 이 사찰의 중심축 위에 놓여 있다. 탑의 높이는 지금 남아 있는 것만 4m 가량 된다.

 

탑은 2단으로 된 밑기단과 3층으로 된 탑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맨 아래는 여덟장의 다듬은 판돌을 만든

네모난 바닥돌이  있는 데, 그 한 변의 길이는 2.27m이다. 이와 같이 바닥돌의 넓이를 탑의 넓이보다

약간 넓게 한 것은 탑의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차례로 줄인 탑신과 함께 뾰족이 솟은 느낌을 주는

훌륭한 기법이다. 아래 밑기단의 높이는 밑바닥돌과  가운데돌, 갑돌까지 합하여 0.56m이고 윗밑단의

높이는 1.05m로써 그 비례는 대략 1대 2로 구성되어 있다. 밑단의 각 면은 각각 하나씩의 판돌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 기둥을 3개씩 받치고 그 사이면들에는 조각상을 양각으로 새겼다. 아래 밑단의 것은

<천인(하늘사람)>이고 윗밑단의 것은 팔부신장이다. 탑신의 첫층 정면에는 네모오모기를  새기고 

그 한가운데에 쌍닫이문을 표시하였다. 지금은 2개 의 구멍만 보이지만 원래는 여기에 자물쇠를

형상한 금속제품이 꽂혀 있었던 같다. 각 층의 탑신은 한 개의 돌로 되었으며 양끝에는 모기둥을,

아래에는 한 단의 고임, 위에는 세단의 처마받침을 새겼다. 지붕돌은 물매가 완만하다.

처마의 아래선은 곧고 윗선은 양끝이 약간 들리었다. 탑머리 부분은 지난 6·25전쟁 때 파괴되었다.

신계사 3층 석탑은 아래부분은 넓고 무겁게, 윗부분은 좁고 가볍게 함으로써 전체로써 장중하면서도

높이 솟아 오른 느낌을 주는 탑의 건축적 효과를 잘 나타낸 우수한 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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