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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내금강의 표훈사와 고승의 자취 백화암 부도

신라 문무왕 10년, 서기 670년에 창건된 표훈사는 금강산의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사철로 역사적인 사료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현재 반야보전등 건축물이 남아 있어 삼국시대 건축양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표훈사는 670년에 표훈이 창건하였으나, 1457년에 조선 세조가 보수하여 규모가 일신되었다.  내금강 만폭동에 있으며, 원나라 영종(英宗)이 태자 · 태후와 함께 보시한 후 세운 비가 있다.

 

▼표훈사 3층 석탑

 

 

 

 

 

 

 

▼ 표훈사 능파루

 

 

▼ 백화암 부도 - 서산대사 비

 

 

조선 중기의 고승 普雨禪師(보우선사)의 시 한 수

庵在雲重處 암재운중처            겹겹이 쌓인 구름 속의 암자는
從來不設扉 종래불설비           본래부터 사립문을 두지 않았다
坮森含晩翠 대삼함만취           누대의 숲은 늦 푸름을 머금었고
庭菊帶斜暉 정국대사휘           뜰의 국화는 저녁 볕을 띠었다
木落經霜菓 목락경상과           나무의 서리 맞은 과일은 떨어지고
僧縫過夏衣 승봉과하의           스님의 여름 지난 옷을 깁는다
高閑吾本意 고한오본의           고고하고 한가로움 본래의 내 뜻이라
 吟賞自忘歸 음상자망귀          시읊고 즐기느라 돌아가기를 잊었다.

普雨禪師(보우선사):조선 중기의 고승 號는허응당(虛應堂),나암(懶菴),조선 11대 중종10년 1515~1565
보우는 법명.

15세에출가하여 많은 건물을 세움, 금강산일대 장안사,표흔사등지에서 학문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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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훈사 보덕암(表訓寺普德庵) -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암자.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강산만폭동골짜기에 자리잡은 암자로, 고구려 안원왕 () 때에 보덕화상이 창건했다.
지금의 건물은 1675년(조선 숙종1)에 다시 짓고, 1808년(순조 8)에 중수하였다. 보덕암내금강의 유명한 만폭8담(흑룡담·비파담·벽파담·
분설담·진주담·거북소·배소·화룡담) 중에 하나인 분설담의 오른쪽 20m 벼랑에 매달리듯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기묘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원래 2채의 건물이 있었는데 하나는 너비 1.6m, 높이 2m, 깊이 5.3m의 자연굴인 보덕굴 앞을 막아 절벽에 지은
본전이고 다른 하나는 굴 위에 지었던 요사채 판도방이다. 본전은 정면 1칸(3.35m), 측면 1칸(0.86m)의 단칸 익공형식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벼랑 중간에 높이 7.3m의 구리기둥 하나로 마루귀틀을 받쳐 세웠다. 단층 건물이지만 층층이 기둥과 보를 짜올려 3층처럼 보인다.
구리기둥은 1511년(조선 중종6)에 설치한 것으로, 나무기둥에 19마디의 동판을 감은 것이다. 벼랑 위 평지에 정면 3칸(6.49m), 측면 1칸(3.47m)의
판도방과 돌탑이 있었으나 지금은 보덕굴로 내려가는 층대가 남아 있을 뿐이다.보덕굴이란 이름은 옛날 이곳에서 마음씨 착한 보덕각시가 홀아버지를
모시고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보덕굴 절벽 아래 만폭동 계곡의 바위에는 보덕각시가 머리를 감았다는  세두분이라는 지름 40㎝, 깊이 40㎝의
동그란 샘구멍이 있고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보덕각시가 세수를 하고 수건을 걸었다는 수건바위가 있다.
동굴을 이용한 전실 시설을 여러 가지 형태의 지붕으로 층층이 조화롭게 세운 기교있는 건축이다. 내금강의 오현봉, 청학봉, 향로봉 등을
배경으로 구리 기둥 하나에 의지하여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기묘한 사찰이다.

보덕굴은 만폭동 안에 있는 암자로 규모는 크지 아니하나 특이한 구조로 인해 널리 알려져 있다. 절벽의 일부를 뚫어 거기에 널쭉을 걸치고,

이 널쪽이 떨어지지 않게 밑에서 구리 기둥으로 받친 다음 그 위에 지은 것이다. 구리 기둥만으로는 암자가 지탱되지 않으므로 암자 위쪽 암석에

구멍을 파고 쇠말뚝을 박아 쇠사슬로 암자와 연결시켜 놓았다. 중국사신 정동이 이를 보고 참 불계(佛界)라 하였다고 전한다.

▼자세히 보면  바위산에 북한이 새겨 넣은 글씨가 보인다.

▼보덕암에서 내려 다 본 외금강

▼출렁다리를 건너 가면 보덕암이 있다.

▼바위에 새겨진 옛사람들의 글씨 - 지금이나 그때나 흔적을 남기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

▼삼산국바둑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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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 내금강→ 만폭동

만폭동은 북한 천연기념물 제 455호로 1985년 7월에 지정되었다고 한다.

금강문에서부터 화룡담까지 약 1km 구간을 포괄하는 만폭동은 금강산 중에서도 계곡의 절경을 대표하는 구역으로

수많은 폭포들과 소(沼 : 늪소)들이 있다고 하여 이름이 붙혀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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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금강군 내강리에 있는 사찰.

 

장안사는 표훈사 아래 있는 내금강의 거찰로 신라 23대 법흥왕 515년에 진표가 창건했다.

그후 990년 고려 성종 때 회정이 중건하였고, 14세기 중엽 원나라 기황후가 관원을 고려에 파견하여 중창하였다.

이후 여러번 중수하였고, 조선 말기에 지장암과 비로전 · 극락전을 세웠다.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안사는 금강산의 4대 사찰의 하나로 내금강 만폭동의 유명한 명승지였으며, 내강리 금강산 장경봉 아래 비홍교(만천다리) 건너편에

그 터가 자리잡고 있다. 신라 법흥왕 때, 또는 556년(고구려 양원왕 11) 고구려의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하면서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773년(신라 혜공왕 8) 율사 진표(眞表)가 중수하였고, 970년(고려 광종 21) 불타 없어진 것을 982년(고려 성종 1) 회정(懷正)이 중건하였다.

1343년(충혜왕 4) 원나라 순제(順帝)의 왕후인 고구려인 기씨(奇氏)가 돈과 공인들을 보내와 무너진 건물을 중건하고 새 누각을 지었다.

1458년(세조 3) 세조가 대웅전을 중수하도록 명하고 토지를 하사하였는데, 1477년(조선 성종 8) 소실되어 일청(一淸)이 중건하였다.

1537년(중종 31) 다시 불타 1545년(인종 1) 일청이 또 중건하고, 1728년(영조 4)과 1791년(정조 15) 중창·중건된 뒤 1842년 부원군(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보시로 300여 칸의 대찰로 증축되었는데, 1863년 호조판서 김병기(金炳冀)가 주상하여 공명첩(空名帖) 500장을 내리게 하고,

자신이 1,200냥을 보시하여 중수하였다. 가람배치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구역과 사성전을 중심으로 한 구역의 두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각 중심법당은 중층 구조로 되어 있고 각 영역 입구에 누각 건물 하나씩 갖추고 있었다. 6전(殿)·7각(閣)·2루(樓)·2문(門) 외에

10여 채의 부속건물이 있었는데, 6·25전쟁 때 불에 타버리고 축대·비석 등만 남아 있다.

 

출처- 장안사 [長安寺 ] | 네이버 백과사전

 

▼유점사와 표흔사.신계사와 더불어 금강산의 4대 사찰로 꼽혔으나 현재는 폐허가 되어 장안사터라 쓰인 푯말만 있다.

▼ 장안사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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