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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때로는 삶으로부터 벗어나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것.

                     * - 류시화의 《지구별 여행자》중에서-

단동시내에서 북쪽으로 20km 정도 떨어져 있는 호산장성.  고구려가 수나라 및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세운 박작성으로

추측하지만, 중국인들은 만리장성의 동단이라고 홍보하고 있으니….  무조건 우리 장성으로 믿고 싶은 마음이다.

중국 단동시 호산성에 있는 고구려의 성으로, 고려시대때도 천리장성의 시발점이었다. 현재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는 과정에서

호산장성이라고 가짜성을 세워놓고, 진짜성벽을 수풀더미 속에 버려두고 있다

박작성 인근의 압록강 하구에는 고구려의 대행성(大行城)도 자리잡고 있다.

▼ 작은 시냇물을 사이로 오른쪽이 북한이다.

▼ 장성 아래 마을의 집

▼ 단동시내

단동 시내 병원 간판인데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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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녀산성 - 중국 랴오닝성[遼寧城(요녕성)] 환런[桓仁(환인)] 북동쪽에 있는 고구려 옛 성.

심양 공항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찾아간 작은 마을은 이름조차 단군신화를 연상시키는 환인작은 마을이다.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에서<추모왕(鄒牟王;朱蒙)이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의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으로 삼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서쪽 산 위의 성>이 오녀산성으로 추정된다.

 

해발고도 820m인 천연요새지로 성의 동쪽에서약 1.8m의 성벽이 발견되었고, 800m가 넘는 산꼭대기에 1,000m나 되는 평지가 있고,

숲이 있으며, 또한 샘물이 있는 천연 요새를 찾아 도읍한 동명성왕예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오녀산성은 압도하는 암벽과 범하기 어려운 

기상이 배여 있다. 고구려 초기 산성으로 해발 820m의 오녀산 꼭대기에 동.남.북쪽 삼면을  돌로 쌓았는데 약 300m이다. 남쪽은 절벽이며,

길이가 약 1,000m이다.서쪽 편에는 성벽 없이 산봉우리를 이용하여 장벽을 만들고 있다. 성 안에는 샘물과 "점장대"가 있다.  

환인현의 동북쪽 혼강 북안에 자리잡은 오녀산성은 서쪽과 남쪽은 천연의 절벽이고 산의 정상은 동서로 긴 장방형으로 평탄하며  동쪽과

동북쪽의 경사면 산허리에 돌로 축성이 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2,600m에 달하며 축성의 형태로  보아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성이다.

주몽이 도읍한 졸본성은 2대인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옮기기까지 고구려의 첫 도읍지였다.

▼ 가파른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성에 갈 수 있다.

▼ 오녀산성에서 바라 본 환인의 전경. 에돌아 흐르는 혼강 모습이 용의 용틀임을 닮았다.

▼ 점장대

▼장군봉

유적지 -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던 우물과 집터...등 흔적이 남아 있다.

▼정상에는 약 0.9m 깊이의 연못과 우물이 있다.

산기슭의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高力은 고구려를 지칭)에는 수백기에 이르는 고구려 돌무지무덤[積石塚(적석총)]이 있었으나 

1970년대 초 중국측의 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었다.산 아래를 흐르는 물이 바로 비류수(엄리대수, 엄체수)다. 

북부여에서 탈출하던 주몽이 강을 건널없자 하늘에 대고

 "나는 천제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자인데 나를 여기서 죽게 하느냐"고 소리치자 어별들이 달려와 다리를 만들었다는 곳이다.

저 아래 강 속에 우리의 많은 선조들이 잠들어 있으리라.

해발고도 820m인 천연요새지로 성의 동쪽에서약 1.8m의 성벽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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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2일 - 장군총-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석릉
 
3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평야에는 광개토왕릉비와 고구려 최대형 무덤인 태왕릉·사신총 등
석릉과 토분 1만 기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화강암 표면을 정성들여 가공한 절석(切石)을 7단의 스텝 피라미드형으로 쌓았는데, 기단의 한 변 길이 33m, 높이 약 13m 이다. 기단의 둘레에는 너비 4m로 돌을 깔았으며,  그 바깥둘레에 너비 30m 의 역석을 깔아 능역을 표시하였다. 널방은 화강암의 절석을 쌓아 지었는데, 천장석이 있는 굴식이며, 2개의 널받침이 있다. 1905년 일본인 학자 도리이가 처음으로 현지조사하고, 프랑스 학자 E.샤반과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 등이 조사하여 《남만주조사보고》 등에 발표한 뒤부터 학계에 알려졌다.

돌무지돌방무덤은 대체로 3세기 말∼4세기 초로부터 5세기에 나타나며, 기와를 통해서는 4세기 중엽 이후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므로
이 장군총의 연대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일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이 무덤의 주인공으로는 광개토대왕과 그 아들인장수왕의 것이라는 두 설이 있는데, 현지 중국 학자들은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보고 있다.

▼ 장군총(장수왕릉) 고분 위로 무심한 구름만 흐르고….

▼고스란히 남은 세월의 흔적은 멀리서 온 우리에게 덧없음을 알려 준다.

▼ 우산나무라고 불리는 나무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가면  장군총(장수왕릉)의 부속이라고 추정되는 능.  후궁의 무덤이라 추측 되어 진다고….


▼ 보기에도 위태위태하다. 더 이상 허물어지지 않았으면….

▼ 멀리 옆으로 장군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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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족오(三足烏)고대 신화에 나오는, 태양 안에서 산다는 세 발 달린 상상의 까마귀.
 

‘삼족오(三足烏)’ 는 흉조(凶兆) ‘까마귀’가 아니라 길조(吉兆) ‘태양새’다.


왜 발이 셋 달린 까마귀가 고구려의 상징일까?

 

8대 단군 우서한(于西翰) 편에 있는 삼족오에 관한 내용이다.

『갑인 7년(BC 1987), 세 발 달린 까마귀가 궁전의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날개의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 /

甲寅 七年 三足烏飛入苑中 其翼廣三尺 〈단군세기〉․〈단군고사〉 고구려 고분벽화 전시회를 유심히 관찰한 사람이라면

‘왜 고구려 벽화속의 태양에는 세 발 달린 검정 새가 그려져 있을까? 하는 의문을 한번쯤 가졌을 법하다.

더구나 그 새가 하필이면 까마귀일까? 고대에는 여러 민족이 까마귀를 길조로 여겼으니, 우리 선조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까마귀는 알타이 지방, 바빌론, 유럽, 중국, 일본, 그리고 성경에까지 등장하며,세계 각지의 설화에도 등장한다.

그러나 발이 셋 달린 까마귀는 고구려 벽화 외에는 어디에도 없다. 우선, 삼족오는 동이족의 특징인 난생설화(卵生說話)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단군조선 이후 북부여와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우관(烏羽冠)이라 하여 까마귀 깃털로 만든 관을 썼다.

까마귀의 다리를 셋으로 표현한 것에는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할 수 있다. 즉 단군조선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진한’ ․ ‘번한’ ․ ‘마한’의

세 나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또 고구려에 이르러서는 단군조선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고구려’ ․ ‘백제’ ․ ‘신라’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와 함께 삼족오의 의미를 天符印 3개로 일컬어지는 고유의 경전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 3대 경전 가운데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에는 “집일함삼 회삼귀일執一含三 會三歸一”이라 하여  “하나를 잡으면 그 속에 셋을 포함하고 있고 그 셋은

다시 하나로 돌아온다.”는 동양철학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하나’는 시공을 초월한 보이지 않는 우주 삼라만상의

근원을 말하는 것이며, ‘셋’은 현상계의 삼라만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셋은 또한 천天(원 ․ 무극 ․ 본),  지地(방 ․ 반극 ․ 체), 인人(각 ․ 태극 ․ 용)을 의미하는

삼신 일체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가 하나(일 ․ 무 ․ 공)에서 시작되어 모든 형상(삼:현상계)을 이루었지만 이는 다시

근본자리인 하나(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우리 민족에게만 있는 삼태극(三太極)문양도 이러한 고유의 철학적 이념을 문양으로 기호화한 것이다.

결국 삼족오와 삼태극 문양은 동일하게 천부인 3개의 핵심적인 내용인 ‘집일합섬 회삼귀일’라는 오묘한 철학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우리 민족 혼 찾기 사이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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