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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6대 임금 단종(端宗)을 배향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 영모전(永慕殿)

1977년 11월 28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다. 영월의 주산인 매봉산(삼각산) 자락 남쪽 언덕에 있다.

원래는 성황당이 있던 자리로, 어린 나이에 유배되어 세조의 사약을 받고 죽은 단종을 추모하기 위하여 1517년(중종12)

영월부사 이용하(李龍夏)가 군민의 성금으로 사당을 건립, 그의 영정과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후손인 이계진이 개수하여 ‘영모전’이란 현판을 걸었다. 원래의 영정은 단종이 곤룡포를 입고 용상에 앉아 있는 형상이었으나,

2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형태가 훼손되어 불사르고 비슷한 모양을 그려 모셨는데 6·25전쟁 때 훼손되었다.

그후 추익한(秋益漢)이 백마를 탄 단종에게 산머루를 진상(進上)하는 모습의, 김기창(金基昶)이 그린 영정을  전내 중앙에 안치하였고, 

대통령 이승만이 쓴 현판을 다시 걸었다.

 

건축의 형태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중앙 칸은 뒤로 물려 영정을 모시는 재실을 두었다.

전면에는 4분합 장지문을 달았다. 건축양식은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익공양식으로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추익한은 단종이 이 영월로 유배되어 관풍헌(觀風軒)에 있을 때 산머루를 따다가 진상하면서 자주 문안드렸다.

한때 한성부윤으로 지내다가 1434년 사직하고 고향 영월로 내려가 있다가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영월군 중동면 연상리(지금의 화원리)로 옮겨와 살면서 단종을 찾아가 문안드리고머루,달래 등 귀한 과실을 구하여 진상하였다고 한다.

단종은 추익한이 진상하는 과일을 맛있게 들고 그에게 크게 위로받았는데, 그는 자신의 성명을 밝히지 않고 다만 연상리 촌민이라고만

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장릉지(莊陵誌)》나 《육신전(六臣傳)》에 그 이름이 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추익한은 단종에게 산머루를 진상하려고 영월로 오던 중 연하리에 이르렀을 때, 곤룡포와 익선관 차림에 백마를 타고 동쪽을

향해 가는 단종을 만나게 되었다. 추익한은 황망히 읍하고 땅에 꿇어앉아 “대왕마마께서는 어디로 행차하시나이까?” 하고 여쭈니

단종이 “태백산으로 가는 길이오. 그것은 처소에 갖다두시오” 하고 말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 추익한은 기이하게 생각하고 급히

단종 처소에 가보니 단종은 이미 승하한 뒤였다. 추익한은 방금 전 만났던 것이 단종의 혼령이었음이 분명하다 생각하고 그의 뒤를 따라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래서 단종과 함께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단종 혼령이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었다는 전설은

단종을 숭상하는 일종의 신앙으로 발전하여 영모전 외에 녹전 성황당, 정선각, 보덕사의 칠성각 등에서도 단종의 위패 또는

영정을 모시고 있다. 해마다 단종문화제가 열리는 시기와 음력 10월 24일(단종 승하일)에 제향을 올린다.

 

▼영모전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6호. 조선 6대 임금인 단종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보덕사 칠성각에 있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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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충사와 낙화암

 

민충사는 금강공원내에 위치하고 있는 사당으로 단종 승하후 낙화암에서 강물에 몸을 던져 단종의 뒤를 따른 시녀와 시종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민충사 앞에 자리잡고 있는 금강정에서 동쪽으로 암벽을

이루고 있는 낙화암이 있다. 1457년 관풍헌 처소에서 사약을 받고 단종께서 승하하시니 단종을 모시던 시녀와 시종들이

이 낙화암에서 몸을 강물에 던져 순절하니 당시 순절한 사람이 10인 또는 99인이라 전하기도 하고, 또는 현 장릉 경내 배식단에

모신 위패가 6위인 점으로 보아 낙화암에서 순절한 시종은 6인으로 보기도 한다.

 

민충사는 이 일과 관련하여 순절한 여인들을 모신 사당으로 1742년(영조18)에 홍영보가 창건하고 1791년에 영월부사 박기정이

개축하였다. 사당내에 "英廟 壬戌命建詞 戊寅特賜額重修令 上十五年 辛亥改建 觀察使尹師國 "

(영묘 임술명건사 무인특사액중수령 상십오년 신해개건 관찰사윤사국)이란 기록으로 보아 이 사당은 조정의 명을 받아 건축하고

사액을 받은 사당임을 알 수 있다. 건물은 자연석 기단위에 전면 3간 측면 2간의 규모로 전면은 반간을 물려 각 간마다 2분합 띠살문을

달았다. 기둥은 자연석 주초위에 둥근 원주를 세웠다. 건물구조는 익공 계통의 양식을 따랐으며 지붕은 흩처마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단종의 시녀와 시종을 기리는 곳, 민충사

1457년(조선 세조 3) 단종이 죽음을 당하자 그를 모시던 시녀와 시종들이 낙화암에서 강물로 몸을 던져 그의 뒤를 따랐는데,

민충사는 이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시녀와 시종들이 투신한 뒤에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그 장소를 낙

화암이라 부르며, 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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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군 영월읍에 있는 정자 금강정

 

영월읍 영흥리 남한강의 상류 연안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시대에 세운 정자로 강원도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정자는 1428년(세종10)에 김복항이 건립한 정자라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寧越題詠(영월제영)에는 

군수 이자삼이 금강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리로 정자를 짓고 금강정이라는 이름을 달았다고도 한다.

금강정 아래로는 푸른 동강이 흐르고 있으며, 앞으로 보이는 계족산과 태화산이 절경을 이루고 있어 , 1684년(숙종10)에

우암 송시렬이 그 절경을 바라보며 금강정기를 썼다고 전해온다. 정면 3간, 측면 3간익공계 양식의 건물로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처마는 겯처마에 팔작지붕이고 모로단청 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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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단종이 꿈에서 본 영월 금몽암(禁夢庵)

 

1984년 6월 2일 강원도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680년에 의상조사가 "지덕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그 뒤 조선시대 단종이 이곳에 대한 꿈을 꾸고 금몽사(禁夢寺)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훼손되었으나 1610년(광해군 2) 군수였던

김택룡(金澤龍)이 건물을 보수하고 노릉암(魯陵庵)으로 고쳐 부르다가 1662년(현종 3) 영월군수 윤순거(尹舜擧)가 다시 중수하였다.

1698년(숙종 24) 단종이 복위되고 보덕사(報德寺)가 원당이 되자 폐사(廢寺)되었다가 1745년(영조 21) 당시 단종의

무덤인 장릉(莊陵)의 참봉 나삼(羅蔘)이 옛터에 암자를 다시 세우고 금몽암이라 하였다. 1978년 건물 내에 석조여래입상을 안치하였다.

 ▼절 입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금몽암 해우소

▼금몽암 근처 오솔길

▼금몽암에서 저 길을  따라 내려가면 보덕사가 있다.

금몽암 033-372-0004

주소 -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1117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 보덕사(報德寺)의 부속암자이다.1457년(세조 3) 유배 중이던 단종이 금중(禁中)에 꿈을 꾸고

창건하였으므로 금몽암이라 하고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610년(광해군 2) 군수 김후(金侯)가

승려를 모아 다시 짓고 노릉암(魯陵庵)이라고 하였으며, 1662년(현종 3) 응잠(應岑)이 중건하고 지명을 따라 지덕암(旨德庵)이라 하였다.

1698년(숙종 24) 단종이 복위되고 그 묘가 장릉(莊陵)으로 승격하자, 암자터에 큰 절을 지어 보덕사라 하고 금몽암을 폐하였다.

1745년(영조 21) 장릉참봉 나삼(羅蔘)이 사재로 옛터에 새로이 절을 짓고 다시 금몽암이라 하였으며, 1792년(정조 16)

한명(漢溟)ㆍ재엽(載燁) 등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요사채가 있다. 절 자체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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