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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강의 표트르 대제 동상

 

5시에 저녁을 먹고 공항으로 가려면 금요일 오후라 이곳도 도로가 상당히 막히니 일찍 서둘러 공항에 가야 한다는 재촉이다.

모스크바에서는 구경한 시간보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었던 것 같다. 일식 도시락으로 저녁을 먹고

노련한 버스 기사 샤샤의 운전으로도 평소 배 가까이 걸려 공항에 갔는데 1시간 30분이나 delay 되었단다.

연기라는 우리 말을 두고 영어로 말하면 더 교양있어 보이는지 너도나도 쓴다.

그럴 줄 알았으면 지하철도 몇 정거장 더 타고 아르바트 거리도 보고 오는 건데 아쉽다.

 

기내에서 여기 사람들이 우리 김치처럼 먹는다는 곡물 발효 빵에 야채는 없이 치즈 두 조각.

햄 두 조각 얹어 팩 사과 음료와 함께 나온다. 배는 고픈데 얼마나 까끌까끌한지 목으로 넘어 가지 않아 반 이상 남긴다.

 

▼모스크바 강에 있는 표트르 (Pyotr Ⅰ) 대제

알렉세이의 14째 아들이다. 알렉세이 황제의 후처(後妻) 나타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10세 때에 궁중혁명(宮中革命)으로

크렘린에서 쫓겨나 모스크 근교 프레오브라젠스코에 마을로 이사하였다. 정규 교육이라고는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랐으나,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건강하여, 초인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정력적인 방법으로, 러시아에 주류하던 외국인들로부터

포술(砲術) ·조선술(造船術) 등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배워 익혔다.

표트르 1세 대제는 러시아 황제(재위 1682~1725). 1697년에는 사절단과 함께 네덜란드, 영국, 독일 등지를 순회하면서, 조선술,

포술을 배우는 한편, 각국의 풍속, 제도를 연구하고 귀국한 뒤 귀족에게 서유럽 식의 풍속 관습을 강요하였으며, 율리우스력을

채용하는 등 적극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다. 1700년 발트 해 진출을 기도하여 북방 전쟁을 벌였고,  1711년 투르크와의 싸움에 패하였다.

그러나 1721년 뉘스타트 조약에서 발트 해 연안을 획득하여 숙원을 풀었다.1722, 1723년 페르시아에 원정하여 카스피 해 서안을 병합하였다.

이러한 전쟁은 농민에게 군사, 운수 등 계속적으로 무거운 부담을 지워 초기에는 농민의 반란을 야기하였으므로 그는 내외의 곤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강력한 행정 조직의 확립을 목표로 절대주의 국가를 확립하였으며, 교육 문화에도 힘을 기울여 러시아의 근대화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식 도시락으로 저녁을 먹고

▼외국 어디서나 보게 되는 삼성전자 광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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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 입구

 

우리의 홍대와 비슷한 아르바트 거리 입구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인천 주물공장에서 8여 년 일하다 온

모처럼 한국인을 만나 한국어로 이야기하게 되어 좋다는 아저씨를 만났다.

한국말이 어쩌면 그리 자연스러운지, 우리말 배우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 가 보다.

 

상트 페테르 부르그로 가야해 거리 입구만 구경하다.

우리 시내 못지 않게 차가 밀리고 복잡해서 공항에 가려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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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붉은광장(Krasnaya Ploshchad)의 성 바실리 대성당.국립역사박물관.

부활의 문.옛 레닌박물관

 

성 바실리 대성당은 '중재하는 성모 마리아 성당'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타타르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때 마다 성자의 이름을 따서 하나씩 성당을 추가 해

나가는 식으로 건축을 하면서 오늘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바실리 성당이 된것은 9번째 승리를

얻은날이 바실리 성인의 축일이라 그의 이름을 따게 되었는데 바실리 성인은 자신의 맏아들을

아버지가 스스로 죽이게 될것이라는 이반대제의 비극을 에언한 성인이기도 하다.

 

▼바르셀로나 구엘공원의 가우디의 헨델과 그레텔 과자집이 생각난다.

 

▼상크트 바실리 대성당

붉은 광장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200여 년간 러시아를 점령하고 있던 몽골의 카잔칸을 항복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반 대제의 명령으로 지어졌다. 그리스 정교 사원은 가장 러시아적이면서도

특색 있는 건축물로 알려져 있는데 다양한 색채와 무늬를 자랑하는 9개의 돔 지붕으로 이루어졌다.

이반 4세는 완공된 성 바실리 대성당의 모습에 반해 이런 아름다운 건물을 두 번 다시는 못 짓게끔

건축을 담당했던 '바르마'와 '보스토니크'의 눈을 멀게 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보스트니크가 완공 이후에도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미닌과 포자르스키 동상

성 바실리 사원 앞에는 1612년, 폴란드의 침입으로부터 모스크바를 지켜낸

니즈니 노브고르드 출신의 정육점 주인 "미닌"과 수즈달의 대공이었던 "포자르스키"

두 사람을 기념하는 동상이 서 있다. 원래 광장의 한가운데 서 있던 이 동상은 1936년,

붉은 광장에 레닌의 묘가 들어서면서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다.

 

 

 

역사적으로는 상업광장·화재광장 등으로 불렸다가 17세기 말부터

아름다운(크라스나야)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크라스나야에는 ‘붉은’이라는 뜻도 있다).

현재 메이데이 등의 시위행사나 사열식이 행해진다. 크라스나야 폴로시차지(붉은 광장)라고

부르게 된 것은 17세기 후반의 일이고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단장된 것은 19세기 말 무렵이었다.

 

 

▼국립역사박물관

 

 

부활의 문

 

옛 레닌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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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닌묘. 굼백화점.부활의 문.카잔성당 Kazan Cathedral이 있는 붉은 광장을 가다.

 

낮에 보는 붉은 광장은 밤 보다는 덜 아름답고 굼 백화점 공사로 어수선하다.

30여 분의 시간안에 다 보려니 마음만 급하고 오후 5시가 다 되어 가는데 내리쬐는 태양이

뜨거워 다니기도 싫을 정도다. 바실리 성당이 보이는 곳까지 가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오기에는

너무 넓은 광장이다. 백화점 맞은 편 붉은 성곽 아래 레닌을 비롯한 유명한 인물들의

묘가 있다는 것도 한국에 와서야 알았다. 멀찌감치 보긴 봤으니 봤다고 해야 하나.

 

 붉은 광장은

다갈색의 포석(鋪石)이 깔려 있으며, 가장 넓은 부분의 너비는 100m, 길이는 500m 가량이다.

남동단의 화려한 바실리블라제누이 성당(16세기), 크렘린 쪽의 레닌묘, 북서단의 역사박물관 등

아름다운 역사적 건물과 유명한 굼 백화점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15세기 말부터 크렘린 정면의 광장이 되었으며, 차르의 선언이나 판결, 포고가 내려지던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상업광장·화재광장 등으로 불렸다가 17세기 말부터 ‘아름다운(크라스나야)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크라스나야에는 ‘붉은’이라는 뜻도 있다). 현재 메이데이 등의 시위행사나

사열식이 행해진다. 크라스나야 폴로시차지(붉은 광장)라고 부르게 된 것은 17세기 후반의 일이고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단장된 것은 19세기 말 무렵이었다.

 

부활의 문

 

 

 

 

 ▼레닌의 묘가 보인다. 뒤 건물은 크레믈린 궁

 

 

 

 

화려하고 큰 굼 백화점

 

 

 

 

 ▼지금 오후 4시 25분을 막 지나고 있다.

 

▼카잔성당 Kazan Cathedral

카잔성당은 1612년의 폴란드 리투아니아 침략자를 몰아낸 것을 기념하고 이 때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진 1579년 카잔에서 발견된 이콘화 '카잔의 성모'를 모시기 위하여 1630년경에

이곳에 세워졌다고 한다. 1632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36년10월에 다시 건설하였는데1936년,

붉은광장에서의 군사 퍼레이드를 위하여 스탈린의 명령으로 철거되었다가 소련의 몰락 후,

1993년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그러나 복원 된 성당에 있는 '카잔 성모의 이콘'은 복사본이고

원본은 지금 Yelokhovo 성당에 있다고 한다. 지금의 카잔성당은 붉은광장 입구를 밝히는

러시아 정교회의 상징으로 명성을 유지하며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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