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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초- 고구려 유적지를 보기 전에 백두산에서 양강도 삼지연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백두산에 있는 폭포.

천지 북쪽에 결구가 형성되어 있고, 천지의 물이 결구를 통해 1천여 미터의 긴 협곡까지 흘러 폭포를 형성했다.

장백폭포는 높이가 60여m의 웅장한 폭포로 200m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폭포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폭포는 크게 두 갈래의 물줄기로

나눠져 있고 동쪽 폭포 수량이 전체 수량의 3분의 2를 차지하며 떨어진 물은 송화강(松花江)으로 유입된다.

중국 북방의 폭포들은 모두 겨울에는 얼어서 그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오로지 장백폭포만은 일년 내내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또 마치 용이 날아가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비룡폭포(飛龍瀑布)"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계단을 올라 터널을 지나고 승사하를 지나면 천지 북파로 불리는 천지가 있다.

북방의 모든 폭포는 봄에서 가을까지 물이 있어 장관을 이루지만 겨울이면 물이 언다. 장백폭포만은 겨울에도 얼지 않고 계속 흘러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새파란 하늘 아래로 하얗게 뿜어내는 장백폭포 물줄기가 시원하기 그지없으며, 옆으로는 검회색 돌산이

솟아 있고 주변에는 울창한 푸른 미인송 숲과 폭포 옆에는 천지로 향하는 터널 계단이 있어 그곳을 통하여 천지 물가까지 갈 수 있다.


16개의 산봉우리가 천지 기슭을 따라 병풍 모양으로 천지의 삼면을 둘러 싸고 있다. 북쪽의 트여진 곳으로 물이 흐르며 물은 1,250m까지

흘러 내리며 물의 양은 많지 않으나 가파른 지형의 영향으로 물살이 빨라서 먼 곳에서 보면 하늘을 오르는 다리를 연상하게 하여 사람들은

이를 '승사하'라고 부른다. 승사하는 개활지를 통해 흐르다가 68m의 장대한 폭포를 이루며 90도 수직으로 36m 아래까지는 곧게 암벽을 때리며 떨어진다.

 

2007년 8월 초- 고구려 유적지를 보기 전에 백두산에서

한여름인데도 물이 차거워 발을 담그고 있기 힘들었다.

수직으로 된 절벽에 이르면 높이 68m가 되는 폭포로 굉음과 함께 물이 떨어지는 장대한 폭포.

 

통천하는 이도백하라 불리우며, 계속 흘러 송하강의 원류가 되고, 마침내 동해로 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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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현에 있는 옛 고구려의 성(城).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  북쪽 2.5km 지점의 해발 676m 환도산(丸都山)에 위치하고 있는 고구려시대의 성곽으로 환도산성이라고도 부른다. 현재는 대부분이 허물어지고 남측성벽과 망대 등 일부만 남아있다.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지역은 고구려의 옛 수도로, 국내성(國內城)이 있었던 곳이다. 고구려는 도성의 경우, 평상시에는 평지성에 거주하다가 비상시에 인근의 산성으로 피난하는  평지성·산성의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는데, 환도산성(丸都山城)은 비상시에 거처하는 곳이었다.

평지성인 국내성은 왕궁과 관청이 있고 귀족들과 일부 평민들이 거주하는 도성이었다. 환도산성은  위급할 때 피난하는 방어성으로, 험준한 산세에 의지한 산성 안에는 궁궐터가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환도산성은 고구려 제10대 산상왕(山上王· 재위 197∼227) 즉위 2년(198)에 처음으로 쌓았다가 같은 왕 재위 13년(209)에 천도한 후 서기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왕성(王城)으로 기능했다.

국내성은 평상시에 거주하는 평지성이고, 위나암성은 전시때 사용하는 산성이었다. 위나암성은 뒤로 가파른 산능선을 두르고 있고 앞에는 퉁거우강(河)이 흐르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로 평가되는 곳이다. 또한 국내성과 압록강까지 내려다 보이기 때문에 적의 움직임을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

음마지(飮馬池)는

고구려 병사들이 말에게 물을 먹이던 곳이다. 음마만(飮馬灣), 또는 연화지(蓮花池), 양어지(養魚池)라고도 부른다. 넓이가 약 5~60㎡ 되는 움푹한 지대이다.

▼성이 있었다는 성터

위나암성은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공격루트가 남문 한곳이기 때문에 이곳만 방어하면 난공불락의 산성이었다. 성벽 둘레는 약 7km, 동쪽 성벽 높이는 6m이다.
▼망을 보던 점장대


환도산성의 석축성곽 - 발말굽 모양의 불규칙한 타원형 형태의 돌로 쌓아 올린 산성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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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하고분군 남쪽의 7세기고구려분묘 - 5회분 5호묘(五盔墳 五號墓)고분벽화(高句麗國內城古墳壁畵)

5회분 5호묘는 중국 길림성 집안시 퉁구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무덤이다. 6세기 중반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무덤이 특히 중요시되는 이유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와 함께 풍부한 설화적 내용이 담겨있는 신선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1950년대에 발견되어 보존 상태도 좋아 고구려의 풍부한 문화와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고분의 크기는높이가 8m,  둘레가 160m 정도로 꽤 크며 안에 들어가 보면 방이 하나인 단실분이다. 네 벽면에 3각 고임 돌을 모서리에 평행하게 얹어서 1층 기단을 만들고, 다시 그 모서리에  3각 고임돌을 얹어서 2층 기단을 만든 후, 평평한 4각 돌을 얹어서 천정을 마무리 하였다. 이러한 것을 평행삼각고임이라고 하며 후기 단실묘에 주로 나타난다.

먼저 고분에 들어가면 4벽면에는 북쪽의 현무, 동쪽의 청룡,남쪽의 주작,서쪽의 백호가  그려져 있다. 고분 바닥에는 남북에 평행하게  3개의 관상이 놓여져 있고, 4벽면의 위에는 용이 서로 꼬여 길게 무늬를 이룬 띠가 그려져 있다. 천정에 그려진 신선도는  영혼불사(靈魂不死)를 믿는 고구려인들의 내세관과 관련이 있다. 고구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하늘을 날아 후세계(死後世界)로 간다고 믿었는데, 여기에서 비행(飛行)의 능력을 가진 조류(鳥類)가 매개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신앙은 사후에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는 내세관을 형성시켜 벽화고분의 천정 부분에 다양한 모습의 신선도(神仙圖)를  그려놓았다. 1층 기단을 보면, 동쪽에는 우수인(소머리 신), 불의 신, 남쪽에는 야철신, 제륜신, 서쪽에는 연마신, 용탄신, 북쪽에는 일신, 월신이 그려져 있다. 2층의 기단에는 북쪽에 3명의 비천이 있고 동쪽에는 깃발 든 신선과 봉황을 탄 신선. 남쪽에는 공작을 탄 신선과 비천, 서쪽에는 용 탄 신선과 학 탄 신선이 그려져 있다. 맨 위 천정에는 황룡이 꿈틀거리면서 이 고분의 주인공이 심상치 않은 인물임을 보여 준다.

▼개망초꽃으로 뒤덮힌 5호 고분

고분의 크기는 높이가 8m, 둘레가 160m

그 외 고분 (여기저기 무덤이 경주의 고분군과 흡사하다.)

 

농신도: 지안 5호분의 벽화.
머리는 소, 몸은 사람 모습을 한 반인반수의 농신이 나무 숲 공간을 날고 있는 형상의 그림이다. 손발의 율동적인 표현과 옷·옷고름의
동적(動的)인 선의 움직임 등 매우 추상적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며, 발에는 신을 신고 있어 특이한 인상을 준다. 고구려벽화 예술의 정상을 이루는 그림으로, 이 벽화에 잇대어 복희(伏羲)·여와(女綾) 등의 형상도 보인다. 또 그 외 악기를 타는 여인 등이 있었다.

1980년대 초 고구려의 초기 도읍이었던 중국 지안[集安]의 국내성 고구려고분에서 중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공개된 일련의 벽화

고구려 무덤벽화에는 고구려인들의 사상, 종교, 생활상 등이 내재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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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고구려 두번째 수도였던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의 국내성

국내성 고사(古史)에 “주몽(朱蒙)이 부여(夫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졸본은 고구려의 첫번째 수도인 흘승골성(紇升骨城)과 같은 곳이다. AD 3년(유리왕 22)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겼는데, 그 위치는대체로 지린성(吉林省) 지안현(輯安縣)에 있는 성터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통구성(通溝城)이 국내성이라고 보고 있다.

국내성지도와 고구려 전성시대의 영토

국내성은 기원후 3년, 즉 유리왕 22년부터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고구려 수도였던 곳이다.  전쟁 등 특수한 상황에는 다른 지역으로 일시 천도하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400여 년 동안 고구려의 도읍지 역할을 했다.

▼유리로 되어 있는 저 곳은 그 당시의 하수 시설을 보여 주기 위해 설치 한 것

졸본성에 이은 고구려 제2의 수도였던 국내성은 사각형 방형으로 북쪽 우산과 서쪽 칠성산에 에워싸인 배산임수의 천연요새이다. 압록강 서쪽에 위치한 국내성은 총면적 13,000평, 성길이 2,686m, 높이 1~5m로 총6개의 성문과 해자가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1921년 중국정부에서 성을 개수하면서 옹성의 모습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또한 동서남북에 각각 세워져 있던 성문마저 1947년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전투 때 소실되었다.  원래 성벽의 높이는 7m였으나 거의 훼손되어 없고 현재 민가가 있는 남서쪽 성벽 3~4m 와 아파트 건물 사이에 위치한 벽 4~5단만이 겨우 남아있을 뿐이다.

▼국내성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86m이며 동서가 남북에 비해 약간 길다.

성벽 중에 조금 튀어 나온 곳을 치라고 한다. 국내성 성곽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고구려 성의 특징은 '치(稚)'다.' '치' 양식의 성곽구조물은 한반도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며 고구려의 성벽양식도 이 치 양식이다.

북한 식당 `묘향각`에서 만난 북한 아가씨들이 `고향의 봄`을 부를 때 몇몇분은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리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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