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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서 국내성. 환도산성. 호태왕릉과 장수왕릉 등 고분군을 보고

북한과 경계 도시인 단동으로 간다. 집안으로 가는 길은 가도 가도 끝없는 옥수수 밭과 넓은 벌판에 붉은 기와 지붕을 얹은 집들이 중국이라고

생각들지 않을 정도로 서정적인 풍경이긴 하다. 특이한 건 집들이 일자형에 두집이 있는 연립주택이며, 얼기설기 나무로 된 광이 집집마다

보이는데 아마도 옥수수 저장고 같았다. 심양에서 백두산 이도백하로 가는 길은 비포장 길도 있었으며, 비포장길이라  장마철엔  물웅덩이가

있어 버스가  진훍탕에 빠지는 일도 있고, 물이 범람하여 길이 끊기면  빙 돌아 가기도 한단다.  운이 좋아 길이 끊어지지 않았으나,

성능이 좋지 않은 좁은 버스로  8시간 이상 가려니 나중엔 온 몸이 뒤틀리고 피곤하기만 했다. 환인의 오녀산성을 보고 거의 밤 10시가 넘어

백두산 밑  이도백하에 도착했었으니, 이 번 여행은 이틀은 반 이상을 길 위에서 보낸 셈이다~ㅎ.

고속도로 톨케이트 잠시 검문이 있어서 내렸던 것 같다.
 오래전에 독일의  아우토반이라는 고속도로를 보고 생각보다 다른 느낌을 받았었다. 지방 어딜가나 시원스레 뚫리고 포장된 우리 길이 새삼 좋다고 생각했다.

▼ 이도백하의 백두산으로 가기위해 탔던 버스와 우리가 묵었던 여관

▼단동으로 가는 길

집안 국내성의 발음도 어려운  퉁구하. 멀리 보이는 다리를 건너 단동으로 간다.

▼아직도 단동이 275km나 남았네~ 80km로 달려도 2시간 30분이나~ㅋ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잠시~


▼오며 가며 원없이 본 옥수수 밭. 식량으로 사료로 쓰이고 중국 정부에서 수매해 수출도 한단다.
우리가 겨울철 길거리에서 파는 찐 옥수수가  아마도 이곳 것이 아닐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사진에선 안 보이지만 집집마다 나무로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별도의 창고가 있었는데
옥수수 저장고란다. 나무보다는 빨간 벽돌로 지붕을 만든 집은 사는 것이 여유가 있어 보였다.

↑↓ 집들이 모여있다.

울타리 넘어로  본 집.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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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퍼옴

사진 -엇모리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그리고 현재 비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을 광개토왕의 능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왜냐하면 부근에서 ‘태왕릉이 산악과 같이 안정되고 굳건하기를 원한다(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비는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왕 3년(414년)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당시 수도였던 압록강

유역인 중국 길림성 통화전구 집안현 통구성(吉林省 通化專區 輯/集安縣 通溝城 - 중국 현지에서는 集安縣)에서 동북쪽 약 4.5km 지점의

태왕촌(太王村)에 있다. 비는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의 사면석이나 자연스러운 모습의 긴 바위 모습이다. 비는 대석과 비신으로 되어 있고,

비신이 대석 위에 세워져 있으나, 대석과 비신 일부가 땅속에 묻혀 있다. 높이는 6.39m로 한국 최대의 크기로 고구려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m~1.46m로 불규칙하다. 비의 머리 부분은 경사져 있다. 대석은 3.35×2.7m 이다.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통상 알려져 있다.(판독 여부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고 비석이 불규칙하여 글자 수 통계에 이론이 있다.) 본래 비석만 있었으나,

1928년에 집안현 지사 유천성(劉天成)이 2층형의 소형 보호비각을 세웠고, 다시 1982년 중공 당국이 단층형의 대형 비각을 세우고 유리창을 달아 비를 보호하고 있다.

 ◆ 광개토대왕릉비의 정확한 명칭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이다.

 이 비석은 광개토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선왕의 공적을 기리고 묘지를 지키는 연호(烟戶;-일종의 관노비)들에 대한 규정을 남기기 위해 서기 414년에

능의 동쪽에 건립한 것이다. 이 비석의 모양은 아래와 위가 넓고 가운데가 좁은 형태다.높이는 6.39 M이고,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 M.

제2면이 1.35 M, 제3면이 2M,제4면이 1.46M이다. 또한 아랫부분을 받치고 있는 좌단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길이는 3.35 M,너비는 2.7M로

불규칙한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그리고 좌단의 두께는 고르지 못하여 동남측이 0.16M,서북측이 0.63M이다. 이 비에는 사방으로 비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비문의 글자 총수는 원래 1,775자였으나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141자이다.그리고 141자 중 앞뒤 문맥으로 추측 가능한 글자가 9자이므로

현재 132자에 대한 판독이 불가능하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은 고구려의 건국과 관련하여 추모(주몽),유류(유리)대주류(대무신왕)등 3대의 왕위 계승에 대한 것과 광개토왕의 즉위에 대한 내용이다.
둘째 부분은 광개토왕의 치적을 적은 것으로,여기에는 백제정벌,신라구원,부여정벌 등에 대한 내용들이 씌어 있다.
셋째 부분은 광개토왕이 생시에 내린 교시에 근거한 묘비와 연호의 규정을 적고 있다.

※비문의 중요 내용  * 는 지워진 부분.해석하여 올립니다.
(1)영락 태왕 5년(395년)을미년 기사.
영락 5년,그때는 을미년이었다.왕은 비려가 붙잡아간 사람들을 귀환시키지 않자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토벌에 나섰다. 부산을 지나 염수의 상류에 이르러

3개의 부락 육칠백 영(마을)을 격파하고 수 많은 소와 말,그리고 양떼를 노획하였다. 거기서 돌아오면서 양평도를 거쳐 동쪽으로

*성,역성, 북풍에 이르렀다.왕은 사냥을 준비시겼다.그리고 국토를 즐기며 구경도 하고 사냥도 하면서 돌아왔다.

(2)영락 태왕 6년(396년)병신년 기사.
백잔(백제를 낮춰 부른 말)과 신라는 옛날엔 우리의 속민이었기에 조공을 해왔다.그런데  신묘년 이래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을 치고 신라를 공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6년 병신년에 와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했다.우리 군사가 백잔의 국경 남쪽에 도착하여 일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우저리성 **성 각미성 미사성 고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미성 오리성 구*성 고모야라성 ***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농매성 비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대산산성 소가성 돈발성 ***성 누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적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종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승발성 종고로성 구천성 ****핍기국성을 공격하여 취했으며 어느덧 백잔의 도성에

근접하였다.그러나 백잔의 의에 항복하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여 덤볐다. 왕은 위엄을 떨치며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선두부대를 백잔성으로 진격시켰다.

백잔의 병사들은 그들의 소굴로 도망쳤으나 곧 그들의 소굴을 포위했다.그러나 백잔의 군주는 방도를 구하지 못하고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고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맹세하였다."지금부터 이후로 영원토록 노객이 되겠습다. "이에 태왕은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여 후에도 그가 성의를 다하며

순종하는지 지켜보겠다고 했다.이번에 모두 백잔의 58개 성,7백 개 촌을 얻었다.또한 백잔주의 형제와 백잔 대신 10 인을 데리고출정했던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3)영락 태왕 8년(398년)무술년 기사.
8년 무술년에 일부 군대를 백신의 토곡에 보내 순찰하도록 했다.그 결과 막사라성,가태라곡의 남녀 3백여명을 잡아왔으며,이로부터 조공하고 정사를 보고했다.
(4)영락 태왕 9년 (399년)기해년 기사.
9년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화통하였다.왕은 하평양을 순시했다.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아뢰기를 그 나라에는

왜인이 가득하여 성들을 모두 파괴하고, 노객(신라왕)을 천민으로 삼았으니 의탁하여 왕의 지시를 듣고자 한다고 하였다.태왕은 인자하여

그 충성심을 칭찬하고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밀계를 내렸다.

(5)영락 태왕 10년(400년) 경자년 기사.
10년 경자년에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인이 가득했다.관군(고구려군)이

그곳에 이르자 왜적은 퇴각 하였다.이에 우리가 왜적의 뒤를 추적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자 그 성은 즉시 항복하였다.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고 지키게 하였다.신라성,감성 등에서 왜구가 크게 함락되었다.성안에 있던 십분의 구의 신라인들은 왜를 따라가길 거부했다.
이에 신라인을 안차하여 병사를 두게 하였다.신라성 -------------------- 나머지 왜군은 궤멸되어 달아났다.지금껏 신라 매금(이사금)은 스스로 와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하지 않았다.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임금은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

 

사진은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태왕릉

덧붙임/ 비문의 내용

비문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제1면 1행 ~ 6행)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동명왕),유류왕(儒留王=유리왕),

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 등의 세계(世系)와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을 기록해 놓았다. 둘째 부분(제1면 7행 ~ 3면 8행)에는 광개토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과 영토관리(만주 정복, 백제 정벌, 신라 구원, 동부여 및 숙신 정벌)에 대한 내용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해 놓았다.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64개의 성(城)과 1,400개의 촌(村)을 공파(攻破)하였다. 왕의 외정에는 정토복속(征討服屬)과

토경순수(土境巡狩)가 있으며, 한반도내는 전자의 대상이 되어 동일세력권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영락 10년(400)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왜는 축출의 대상이었고 정토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와 같은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셋째 부분(제3면 8행 ~ 4면 9행)은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煙戶)의 숫자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 수묘제(守墓制)의 실상과 함께 수묘인의 신분 등 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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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8월. 백두산 천지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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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天地(천지)- 북파

백두산 풍경중 최고로 뽑히는 천지는 화산의 분화구에 생성된 것으로 해발 2,200m 높이에  위치해 있으며, 백두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데에서 "천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원형을 띠고 있으며 전체 면적은 10㎢, 호수 주위 길이가 13㎞, 평균수심이 204m 정도이다. 천지는 옛부터 안개가 많고 1년 중 맑은 날이 거의 없다. 천지를 둘러싸고 백두산의 16개 봉우리가 솟아 있으며 천지의 물이 흘러 장백폭포와 온천을 형성한다. 또 장백폭포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천지를 닮은 작은 호수가 있어 '소천지'라고 불린다. 천지의 수심 중 가장 깊은 곳은 373m나 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가장 깊은 화구호(칼데라호)로 알려져 있다. 이 곳의 연평균기온은 -7.3℃, 평균수온은 0.7-11℃이며, 11월에 얼어붙었다가 6월이 되어서야 녹는데 얼음의 두께가 1.2m나 된다.

 

천지의 수질이 매우 깨끗하여 먹을 수도 있으며, 주로 지하수와 강수량으로 채워진다.
이곳에는 잉어를 비롯한 몇 종류의 어종이 서식하고 있으며, 중국과 북한의 국경 호수로서
압록강과 두만강 송화강의 발원지이다.
하지만 이 곳의 기후가 불규칙하고  거센 바람과 폭풍우가

자주 발생해서 여행객들이 맑은 날에 천지의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기란 쉽지 않다. 천지는 또 국경선이 통과해 중국과 북한의 경계에 놓여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장백폭포를 지나 북파로 가는 길.
날씨는 비가 되었다가 안개가 되었다가 먹구름으로~ 변화무쌍하다.





▼ 승사하란 표지가 보인다.
천지의 물은 달문으로 부터 산골짜기를 따라 북쪽으로 흐르는데, 장백폭포에 이르러  산이 높고 경사가

가팔라 쏟아져 흐르는 물이, 마치 비스듬히 세워진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보는것 같다하여, 사람들은
 이 사다리처럼 내리쏟는 폭포를 
천하 혹은 통천하 또는 승사하(하늘로 통하는 강)라고 부른다.


 


 












천지는 먹구름 사이로 보일락말락~
누군가 `동해바다` 같다고 해 일행의 폭소와 긍정을 자아내고  한치앞도 허용하지 않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비바람 탓으로 물결이 일었다. 아쉬움을 접고 내려 올 수밖에...



수심도 깊고 바다처럼 넓어 보인다.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었다.



▼두메 양귀비

 








 








천지가 맑게 개인 걸 못 보고 가는 사람이 천지라서, 천지라고 한다나?  믿거나 말거나~..ㅎ
 다시 장백폭포를 지나 아래로~~







천지의 물이 달문을 통해 200m 남짓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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